묵재 (默在, Tacitum)
인간의 감각에 앞서 존재하는 자연을 ‘묵재’라 부르며, 기술과 물질의 관계를 다시 생각한 작가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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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주술》과 미디어의 물질성, 이번 작업의 개념 형성 과정에 관심 있는 독자. 묵재와 아래 다섯 용어는 이 글에서 제안하는 작업 개념이다.
스크린 뒤의 대지, 정동의 재정의: 묵재(默在)에서 지질위계까지
우리는 스크린과 기호의 성벽 안에서 산다. 텍스트로 지은 세계는 견고하지만, 그 대가로 발밑의 대지가 살아 숨 쉰다는 감각과 신체가 본래 자연과 대화하던 가장 예민한 촉수였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러나 대지와의 감각을 회복하려는 논의 속에서 내가 끊임없이 품게 되는 의구심이 있다. 바로 ‘정동(Affect)’이라는 단어 자체의 모순이다. 오늘날 미학과 철학에서 습관적으로 쓰이는 정동은, 어쩐지 자연을 ‘인간과 매개되어야만 비로소 촉발되고 존재감을 얻는 수동적 대상’으로 연상시킨다.
자연은 인간이 바라보든 바라보지 않든 존재한다. 나는 자연을 인간의 감각 안에서만 설명하는 태도에 의문을 품는다. 이 글의 ‘묵재’는 그 의문에서 출발한 이름이다.
데이비드 에이브럼이 《감각의 주술》에서 구술문화의 신체적 언어를 불러낸 감각은 경청할 만하지만, 나는 그 문자 이전의 언어를 발터 벤야민의 ‘아담의 언어’에 빗대어 읽는 것을 더 선호한다. 아담이 이름을 부른 것은 라벨을 씌운 것이 아니라,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를 소리로 번역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사물은 하나의 참된 이름 대신 수백 개의 이름이 덧씌워지는 ‘과잉명명’ 상태에 빠졌다. 벤야민의 말대로 자연은 말을 잃었기 때문에, 너무 많이 이름 붙여졌기 때문에 침묵하게 되었다. 자연의 자족적 실재를 잊은 채 인간의 언어와 ‘정동’이라는 수사로 자연을 마구 명명해온 문명적 오만이 바로 자연을 침묵하게 만든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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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카를 읽으며 더 묻고 싶은 물질정치

유시 파리카, 미디어의 지질학
최근 읽은 유시 파리카의 《미디어지질학》은 이러한 관념적 논의를 지구적 물질성으로 확장하는 데 유용한 징검다리가 되어준다. 파리카는 미디어가 스크린 속 추상적 기호가 아니라 지구의 광물과 금속으로 이뤄진 물질적 연장선임을 밝혀냈다.
파리카는 채굴과 노동, 폐기물의 정치도 다룬다. 다만 나는 그 논의를 읽으며 오늘날 AI의 전력망, 냉각 설비, 공급망과 현장 노동을 더 구체적으로 묻고 싶어졌다. 첨단 알고리즘도 이런 물질적 기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말한 희토류, 석유, 석탄, 그리고 중국에서 생산되는 태양광 패널 등은 미디어의 재료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들은 세계정치 속에서 국가의 생존을 결정짓고, 공급망을 통제하며, 보이지 않는 자원 전쟁의 무기로 작동하는 정치적 실재다.
개념의 정립: 묵재(默在)의 침묵과 정동(Affect)의 재정의
이 지점에서 우리는 존재와 기술, 그리고 신체를 바라보는 개념의 틀을 3단계로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동(Affect)의 어원과 묵재(默在)의 조어 근거를 함께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정동(Affect)은 분야마다 뜻이 다르다. 라틴어 affectus에는 상태, 성향, 감정 등의 뜻이 있으며, 이를 ‘접촉하여 흔적을 남기다’ 하나로 풀이하기는 어렵다. 여기서는 정동을 인간의 신체와 사물이 만나 생기는 관계적 사건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하려 한다.

photograph by Michael Hindman
위 사진을 보면 자연은 그대로 있을 뿐이며 사진가는 그 모습을 포착할 뿐이다.
1. 자연 그 자체: 묵재 (默在, Tacitum)
반면 자연은 타자와의 ‘접촉’이나 외부 관찰자의 ‘포착’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간이 바라보거나 자극하지 않아도 자연은 그 자체로 온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접촉과 표상, 외적 반응을 전제로 하는 정동(Affect)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 자체에 무리하게 부여하는 것은 내 작업에서는 인간 중심적인 해석으로 느껴진다.
인간과의 접촉과 의미 부여 이전에서 그 자체로 묵묵히 존재해온 자연의 지평을 설명하기 위해, 정동(Affect)이라는 부적절한 단어를 대체할 개념으로 나는 ‘묵재(默在, Tacitum)’를 새로이 조어한다. 묵재는 잠잠할 묵(默: Tacit)에 있을 재(在: In-itself)를 쓴 단어다.
인간의 접촉 이전에 존재하는 자연을 말하기 위해 나는 ‘묵재’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구분은 정동의 어원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정의라기보다, 내 작업을 전개하기 위한 제안이다.
Tacitum이라는 표기는 침묵을 뜻하는 라틴어 tacēre와 ‘말없는’이라는 뜻의 tacitus에서 가져왔다. tacitum은 tacitus의 중성형이기도 하다. 새로운 라틴어 어미를 결합했다기보다, 기존 형태에 내 작업의 의미를 부여한 명칭이다.
Tacitum은 ‘외부와의 접촉, 언어적 명명, 관찰자의 관조 없이 그 자체로 잠잠히 침묵하며 존재하고 있는 실재’를 뜻한다. 즉, 인간과의 부딪힘에서 발생하는 affectus(정동)에 대립하여, 인간이 개입하기 전 자연 본래의 무심하고 완벽한 자족성을 엄밀히 규정하기 위해 수립된 개념이다.
2. 인간 매개적 영역: 정동 (Affect)과 ‘경계선’의 함정
라틴어 affectus의 본래 뜻처럼 ‘접촉하여 흔적을 남기는 사건’으로서의 정동(Affect)은 인간과 사물이 부딪히는 지점에서 비로소 발화한다. 정동은 자연 본래의 성질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나 기술이 자연물과 접촉하고, 만지고, 다루면서 사물이 ‘인공물화’될 때 발생하는 관계적 파동이자 장(Field)이다.
길가의 나뭇가지는 그냥 묵재(Tacitum)일 뿐 정동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그 나뭇가지를 매일 들고 다니며 손때를 묻히고 신체의 연장으로 삼는 순간, 접촉을 통해 흔적이 남으며 인공물로 재탄생하고 짙은 정동적 관계를 획득한다.
혹자는 “인간이 손대지 않은 자연 속 동식물 상호 간의 격렬한 물리적·생태적 충돌이나 포식 관계 역시 정동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없이 자연과 동식물이 서로 부딪히는 것은 자연이 자연 그 자체로 충돌하는 것일 뿐이기에 이 역시 오롯이 ‘묵재(Tacitum)’의 영역에 속한다. ‘정동’은 오롯이 인간과 인간의 기술이 자연물과 얽힐 때만 만들어지는 특수한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구분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경계선을 뚜렷이 그어 또 다른 인간중심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자연을 인간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정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가진 인간중심적 성격을 비판하고, 자연을 어설픈 감응의 대상이 아닌 완벽한 즉자존재(In-itself)이자 묵재로 되돌려놓고자 하는 시도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언어로 끌어들이려는 문명적 오만을 걷어내는 것, 이것이 ‘묵재’ 수립의 진짜 목적이다.
5가지 지질정치적 어휘: 현실을 직시하는 기술-생태학
우리가 도나 하러웨이의 ‘사이보그’처럼 기술에 매개된 신체로 도시와 스크린 위에서 대지를 직시하려면, ‘정동’의 사적인 영역을 넘어 현장의 물질성을 포착하는 5가지 지질정치적 어휘가 필요하다.
지질위계 (Geo-Hierarchy): 자원과 광물이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국가 간 권력과 노동 현장의 계급을 결정짓는 정치적 위계 구조.
물성역동 (Material Dynamics): 단순한 감정적 감응을 넘어, 희토류·전력·물리적 장치가 세계를 실제로 바꿔놓는 물리적·기술적 힘.
지정학적 연쇄 (Geo-Entanglement): 중국의 태양광 패널, 아프리카의 희토류 채굴, AI 서버실의 노동이 세계정치의 무기로 얽혀 들어가는 통로.
자원행위성 (Resource Agency):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광물과 에너지 자체가 스스로 정치적·경제적 대형 사건을 유발하는 자율적 물리력.
물질결속 (Material Nexus): AI라는 가상 기술조차 19세기의 석탄과 21세기의 희토류라는 물리적 지지대 없이는 단 1초도 존재할 수 없음을 폭로하는 구조.

중국의 산을 뒤덮은 태양광 패널
인공의 레이어와 묵재(Tacitum)의 역설적 공존
자연 본래의 상태는 ‘묵재(Tacitum)’로서 침묵 속에 자족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채굴하고, 가공하고, 매개하면서, 침묵해야 할 자연은 인간과의 접촉 및 정동을 통해 기후위기와 자원 전쟁이라는 격렬한 형태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침묵을 잃어버린 자연의 목소리 앞에서, 우리가 모색해야 할 기술이란 무엇인가?
사실 단언하기는 어렵다. 아마 다음 생각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기술 자체가 함의하는 바는 끊임없는 정동의 연쇄로 자연물을 인공물로 겹겹이 쌓아 올리는 작업이다. 이 인공적 레이어가 짙어지고 밀도가 높아질수록, 대지는 본래의 묵재(Tacitum)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러나 묵재와 멀어지는 기술이라고 해서 그것이 꼭 ‘나쁜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기술의 흥미로운 역설이 존재한다. 때로는 묵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고도의 인공적 기술 레이어가 역설적으로 묵재로서의 대지를 보존하고 지켜내는 ‘좋은 기술’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한 AI의 매끈한 스크린 밑에는 단지 추상적 알고리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아래에는 현실정치의 자원 외교, 기술적 표준의 합의, 컴퓨터 사이언스, 데이터 마이닝,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 광물을 끌어올리는 광산 채굴 기술까지 수많은 거대한 레이어(Layers)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AI와 기술이라는 거대한 인공물 생태계를 통제하고 자연의 목소리에 응답하려면, 우리는 스크린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그 밑에 겹겹이 쌓인 물질적 레이어들을 직시해야 한다. 묵재의 대지 위에서, 기술 매개적 신체로 구축해낼 ‘기술과 묵재의 역설적 공존’이야말로 21세기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언어다.
7월 중순 작가님 중 한 분께서 ‘감각의 주술 저자와 ‘정동’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시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 생각은 약 3주 가까이 머릿속을 맴돌다 결국, 혼자 만든 조어를 만들게 되며 비로소 만족하게 되었다.
개념의 범위
정동을 비인간적 관계까지 넓혀 다루는 이론도 있다. 여기서의 구분은 작가의 제안이다. 파리카의 책도 물질과 노동 과정을 함께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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