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Thirst) 2부
상현과 태주의 욕망이 선과 악의 경계에 남긴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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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본 뒤 다른 해석과 배경을 함께 읽고 싶은 독자를 위한 글이다.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다.
죄책감이 남은 사람들
박쥐는 감독이 테레즈 라캥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중반에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묘사된다. 상현의 신체는 흡혈귀화 되었지만 정신만은 아직 인간이었으며, 태주는 신체 또한 인간이었다. 이들이 죽은 강우의 환각에 시달리는 장면은 태주가 흡혈귀화하면서 끝나게 된다. 인간의 원죄에서 벗어났거나 혹은 죄로만 구성되었을지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보면 욕망의 덩어리 일수도 있다. 앞서 나는 욕망이 선악과의 원죄보다 먼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자유의지란 없을 수 있다고 하면서 욕망은 운명론적, 결정론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감독은 욕망이 선하거나 순수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글은 원래 감상문의 시점과 말투를 살려 다듬었다. 감독의 의도로 확인되지 않은 연결은 개인적인 해석으로 읽어주시면 좋겠다.

박쥐, 태주와 상현
유혹과 욕망
내 관점에서 읽으면, 금지된 열매를 눈앞에 둔 장면은 유혹과 선택의 관계를 묻게 한다.
뱀의 존재 또한 그렇다. 신이 모든것을 다 안다는 전제하에 뱀이 그런 생물이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다. (유혹)
뱀은 아담과 이브에게 신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욕망을 이용해 선악과를 먹도록 유도했다.
욕망에 따라 선악과를 먹고 원죄를 저지르게 되었다.
이 원죄를 신의 계획이라고 생각한다면 여기서 가장 불확정성에 가까운 확률적 계산에 포함된 존재는 아담과 이브의 욕망이고 이를 통한 선택이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욕망을 통해 설계된 판에 올라탄 장기말이었다.
선택이라는 문제
내가 말하는 욕망은 성욕과 식욕만이 아니다. 설계된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나는 영화가 그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고 싶다.

Lucas Cranach the Elder (1472 – 1553), Adam and Eve (1526)
《박쥐》와 《헬싱》, 《아우터 와일즈》를 보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욕망을 생각했다. 이것을 양자역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상현이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태주에게 신겨준 신발과 마지막에 남는 그 신발을 나는 선택의 상징으로 읽었다. 하지만 사랑과 선행까지 모두 욕망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VINCENT VAN GOGH (1853 – 1890), The good Samaritan
착한 사마리아인을 떠올리며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누가복음 10장 30~37절에 나온다. 낯선 이를 도운 사람이 누구였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나는 《박쥐》의 필리핀 출신 인물 이블린을 이 비유와 연결해 읽었다. 감독의 의도로 확인된 설명은 아니다. 현대 법 전체가 십계명에서 그대로 나왔다는 뜻도 아니다. 여기서 내 관심은 법적 의무를 넘어서 타인을 돕는 마음에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블린 (맨왼쪽)
마지막에 남는 윤리
모두가 태주를 추행하고 멸시할 때, 이블린 만큼은 태주를 친구로 대하고 잘해주었다. 그래서 태주는 이블린을 죽이지 못했고, 상현은 신의 대행자로서 (신부였던 시절도 마찬가지고 가장 힘이 센 흡혈귀 일때도 마찬가지) 이블린 만큼은 착한 사마리아인으로서 살려주었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조연들은 이블린과 엄마를 제외하고는 다 죽음을 맞이하는데 희생자들이 결코 착하지 않다.
운명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욕망에 이끌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 선택의 기로에서 가장 인간다운 최선의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은 인간다운 도덕성에 근거한 선택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지도 모른다.